두 개의 도시, 하나의 현실: 기술의 진보와 영혼의 겨울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31 08:30
본문
인류는 눈부신 기술 발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적 한계를 넘어서는 연산 능력을 선보이며, 생명공학은 질병과 노화의 정복을 꿈꾸게 한다. K-뷰티는 전 세계인의 미적 기준을 선도하고, 제약회사들은 분기마다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하며 인류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고 있음을 자부한다. 오늘의 뉴스 지면 역시 이러한 인류의 성취로 가득하다. 더 저렴하고 강력해진 AI 모델,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화장품 기술, 신약 개발의 가시적 성과 등은 인간 이성이 건설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그러나 지면의 다른 한편에서는 혹독한 영혼의 겨울이 펼쳐진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여성과 소녀들의 희생은 두 배로 급증했고, 가자지구의 주민들은 임시 텐트에서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구호 물품을 실은 트럭은 검문소에 멈춰 섰고, 총성은 평화유지군의 숙소 담벼락을 스쳐 지나간다. 이 극명한 대조는 우리로 하여금 인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인류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기술의 발전이 인간성의 퇴보를 가리는 착시는 아닌가?
고대 로마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인류 역사를 두 개의 도시, 즉 '신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 사이의 투쟁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도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신의 도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전자는 땅의 영광을 구하고, 후자는 하늘의 영광을 구한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바로 이 '인간의 도시'가 가진 내재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도시는 한 손으로는 생명을 연장하는 신약을 개발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 미(美)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굶주리고 떠는 이웃에게 빵 한 조각과 담요 한 장을 건네는 데는 실패한다.
이것이 바로 피조세계의 탄식이다. 기술의 진보와 경제적 풍요라는 화려한 외피 아래, 죄로 인해 신음하는 인류의 고통이 숨겨져 있다. 사도 바울은 이 현실을 깊이 통찰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22-23). 이 탄식은 전쟁터의 비명뿐만 아니라, 끝없는 기술 개발과 미의 추구 속에 담긴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공허함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 두 도시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 도시의 화려한 성취에 도취되어 세속적 성공주의를 복음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기술이 구원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에 있지 않고, 참된 생명은 제약 기술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다. 동시에 교회는 인간 도시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가자지구의 텐트촌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함께 귀 기울이고, 불의와 폭력에 신음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 땅에 속했지만 하늘에 시민권을 둔 '신의 도시'의 전초기지로서, 인간 도시의 거짓된 희망을 경계하고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거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지면의 다른 한편에서는 혹독한 영혼의 겨울이 펼쳐진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여성과 소녀들의 희생은 두 배로 급증했고, 가자지구의 주민들은 임시 텐트에서 네 번째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구호 물품을 실은 트럭은 검문소에 멈춰 섰고, 총성은 평화유지군의 숙소 담벼락을 스쳐 지나간다. 이 극명한 대조는 우리로 하여금 인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인류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기술의 발전이 인간성의 퇴보를 가리는 착시는 아닌가?
고대 로마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인류 역사를 두 개의 도시, 즉 '신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 사이의 투쟁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도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신의 도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전자는 땅의 영광을 구하고, 후자는 하늘의 영광을 구한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바로 이 '인간의 도시'가 가진 내재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도시는 한 손으로는 생명을 연장하는 신약을 개발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 미(美)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굶주리고 떠는 이웃에게 빵 한 조각과 담요 한 장을 건네는 데는 실패한다.
이것이 바로 피조세계의 탄식이다. 기술의 진보와 경제적 풍요라는 화려한 외피 아래, 죄로 인해 신음하는 인류의 고통이 숨겨져 있다. 사도 바울은 이 현실을 깊이 통찰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22-23). 이 탄식은 전쟁터의 비명뿐만 아니라, 끝없는 기술 개발과 미의 추구 속에 담긴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공허함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 두 도시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 도시의 화려한 성취에 도취되어 세속적 성공주의를 복음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기술이 구원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에 있지 않고, 참된 생명은 제약 기술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다. 동시에 교회는 인간 도시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가자지구의 텐트촌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함께 귀 기울이고, 불의와 폭력에 신음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이 땅에 속했지만 하늘에 시민권을 둔 '신의 도시'의 전초기지로서, 인간 도시의 거짓된 희망을 경계하고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온몸으로 증거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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