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적 통치의 선포, 모든 것의 푯대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26 08:30
본문
시대의 흐름은 실로 다양하고 역동적이다. 예술과 행동주의가 결합하여 사회 변화의 도구가 되고, 자메이카의 공동체적 음악 문화 '리듬'은 서구의 개인주의적 저작권법과 충돌하며 새로운 담론을 낳는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잊힌 선교 지도자의 삶이 재조명되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열망은 새로운 안내서의 출간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현상의 저변에는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본질에 다가갈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흐른다.
그러나 무수한 방법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종종 가장 중요한 질문을 놓치곤 한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로버트 레이몬드 박사가 복음 전도를 ‘주권적 통치의 선포’로 재조명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만유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장엄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모든 사역의 궁극적 푯대가 되어야 할 본질이다.
역사는 이 본질에 충실했던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증언한다. 12세기 말,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피터 왈도(Peter Waldo)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한 자들’을 조직했다. 오늘날 ‘왈도파’로 알려진 이들은 당대의 부패한 교회에 맞서 청빈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아닌 평민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길거리에서 복음을 설교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form)은 파격적이었으나, 그들을 움직인 동력은 방법론의 새로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 바로 복음의 본질(essence) 그 자체였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뉴스들은 이 본질의 푯대 앞에서 다시 정렬되어야 한다. 예술과 행동주의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도구가 될 때 비로소 거룩한 의미를 지닌다.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35년간 중국내지선교회를 이끌었던 딕슨 호스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만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은 개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저작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연주하는 공동체의 ‘리듬’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었다. 구약성경을 책별로 깊이 만나려는 노력 또한, 단편적인 교훈을 넘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장대한 통치의 서사를 발견하려는 거룩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 외적인 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방법론적 강박에서 벗어나, 복음의 본질로 회귀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사역, 문화 활동과 사회 참여는 단 하나의 목적,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선포를 향해야 한다. 그 선포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산을 넘는 발걸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신발이 세련되어서가 아니라, 그 발이 전하는 소식이 복되고 참되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 52:7)
그러나 무수한 방법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종종 가장 중요한 질문을 놓치곤 한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개혁주의 신학자 로버트 레이몬드 박사가 복음 전도를 ‘주권적 통치의 선포’로 재조명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만유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장엄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모든 사역의 궁극적 푯대가 되어야 할 본질이다.
역사는 이 본질에 충실했던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증언한다. 12세기 말,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피터 왈도(Peter Waldo)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한 자들’을 조직했다. 오늘날 ‘왈도파’로 알려진 이들은 당대의 부패한 교회에 맞서 청빈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아닌 평민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길거리에서 복음을 설교했다. 그들의 삶의 방식(form)은 파격적이었으나, 그들을 움직인 동력은 방법론의 새로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 바로 복음의 본질(essence) 그 자체였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뉴스들은 이 본질의 푯대 앞에서 다시 정렬되어야 한다. 예술과 행동주의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도구가 될 때 비로소 거룩한 의미를 지닌다.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35년간 중국내지선교회를 이끌었던 딕슨 호스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만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은 개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저작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연주하는 공동체의 ‘리듬’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었다. 구약성경을 책별로 깊이 만나려는 노력 또한, 단편적인 교훈을 넘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장대한 통치의 서사를 발견하려는 거룩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 외적인 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방법론적 강박에서 벗어나, 복음의 본질로 회귀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예배와 사역, 문화 활동과 사회 참여는 단 하나의 목적, 곧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선포를 향해야 한다. 그 선포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산을 넘는 발걸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신발이 세련되어서가 아니라, 그 발이 전하는 소식이 복되고 참되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사야 52:7)
기사 공유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