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뿐인 이름, 생명으로 약동하는 믿음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17 08:30
본문
영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 가장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들의 정치적 구호가 되고 있는 반면,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는 복음의 열기가 뜨거워 하루에 한 곳꼴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전쟁의 폐허 속 우크라이나 청년들은 신앙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경제 위기에 신음하는 스페인 교회는 집 없는 이들의 안식처를 자처하고 나섰다. 세계 각처에서 전해진 소식들은 오늘 한국 교회 앞에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가, 아니면 이름뿐인 유산으로 전락하고 있는가.
영국의 보고서는 신앙이 그 본질을 잃었을 때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서늘한 자화상이다.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모인 이들이 정작 예배와 공동체를 등한시한다는 사실은, 신앙이 복음의 생명력을 잃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장식품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이름은 가졌으되 실체는 없는 신앙,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은 잊은 채 민족과 국가라는 우상에 기생하는 신앙은 결국 스스로를 소금기 잃은 소금처럼 길가에 버려지게 할 뿐이다.
역사는 이러한 명목상의 신앙과 생명력 있는 신앙의 차이를 극명하게 증언한다. 16세기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들에게 신앙은 안락한 기득권이 아니라 목에 겨눈 칼날과도 같은 실존적 결단이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과 같은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신실함과 정직함, 탁월한 기술력은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동력이 되었다. 위그노들의 신앙은 예배당 안에 갇힌 구호가 아니라, 그들의 일터와 가정,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살아 약동하는 능력이었다. 이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안일에 빠졌던 당대 주류 교회의 무기력함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칠레의 교회 개척 열기와 스페인 교회의 사회적 섬김, 우크라이나 청년들의 눈물 젖은 찬양은 바로 이 위그노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 살아있는 믿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확장된다(칠레).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스페인).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일어선다(우크라이나). 심지어 비즈니스의 현장에서조차 세상의 성공 논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스페인 경영인). 이것이 바로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의 증거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의 시대를 지나 이제 신앙의 본질을 되묻는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주일 아침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흩어지는 공허한 메아리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 빛바랜 종교적 관습과 차갑게 식어버린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 교회의 상반된 모습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계 3:1)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서머나 교회가 될 것인가. 그 선택은 오늘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다.
영국의 보고서는 신앙이 그 본질을 잃었을 때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서늘한 자화상이다.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모인 이들이 정작 예배와 공동체를 등한시한다는 사실은, 신앙이 복음의 생명력을 잃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장식품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이름은 가졌으되 실체는 없는 신앙,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은 잊은 채 민족과 국가라는 우상에 기생하는 신앙은 결국 스스로를 소금기 잃은 소금처럼 길가에 버려지게 할 뿐이다.
역사는 이러한 명목상의 신앙과 생명력 있는 신앙의 차이를 극명하게 증언한다. 16세기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들에게 신앙은 안락한 기득권이 아니라 목에 겨눈 칼날과도 같은 실존적 결단이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과 같은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신실함과 정직함, 탁월한 기술력은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동력이 되었다. 위그노들의 신앙은 예배당 안에 갇힌 구호가 아니라, 그들의 일터와 가정,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살아 약동하는 능력이었다. 이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안일에 빠졌던 당대 주류 교회의 무기력함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오늘날 칠레의 교회 개척 열기와 스페인 교회의 사회적 섬김, 우크라이나 청년들의 눈물 젖은 찬양은 바로 이 위그노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 살아있는 믿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며 확장된다(칠레).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스페인).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일어선다(우크라이나). 심지어 비즈니스의 현장에서조차 세상의 성공 논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스페인 경영인). 이것이 바로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의 증거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한국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의 시대를 지나 이제 신앙의 본질을 되묻는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주일 아침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흩어지는 공허한 메아리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 빛바랜 종교적 관습과 차갑게 식어버린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 교회의 상반된 모습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계 3:1)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서머나 교회가 될 것인가. 그 선택은 오늘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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