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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이 아닌 십자가를, 두려움이 아닌 사랑을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16 08:30

본문

온 세상이 거친 풍랑에 휩싸인 배처럼 위태롭다. 유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들은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사회는 저마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깃발 아래 조각나고 있다. 이는 비단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불안과 혼돈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영국에서 들려온 한 보고서는 우리에게 서늘한 경종을 울린다. 스스로를 ‘기독교 민족주의자’라 칭하는 이들이 오히려 교회 출석률이 가장 낮은 집단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신앙의 본질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공동화(空洞化)될 수 있는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한낱 문화적 상징이나 정치적 무기로 전락할 때, 복음은 생명력을 잃고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역사는 이 문제에 대해 엄숙한 교훈을 남겼다. 1930년대, 나치즘의 광기가 독일을 휩쓸 때 수많은 교회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여 스와스티카 깃발 아래 십자가를 종속시켰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와 고백교회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교회의 유일한 주인은 총통이나 국가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목숨으로 증언했다. 바르멘 선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듣고, 살고 죽을 때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선포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저항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신학적 결단이었다. 이들의 순교적 저항은 십자가는 결코 지상의 깃발에 대한 장식품이 될 수 없으며, 우리의 온전하고 유일한 충성을 요구하는 절대적 표지임을 웅변한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권세를 탐하는 길이 아니라, 희생적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길이다. 이주민에 대한 두려움, 타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복음은 우리를 사랑의 사도가 되라고 부른다. 이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분열된 세상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좋은 소식’의 본질이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청년들이 희망을 노래하게 하는 힘이다. 칠레에서 하루에 한 곳꼴로 교회가 세워지는 생명의 역사는, 복음이 세상의 권력과 결탁할 때가 아니라 그 본연의 순수함을 지킬 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함을 증명한다.

사도 베드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9-12)

우리의 국적은 혈통이나 영토가 아닌, 어둠에서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로 결정된다. 우리의 사명은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한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일 뿐이며, 우리의 참된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세상의 이념과 정치적 구호는 달콤한 말로 교회를 유혹하며 영향력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 공허함으로 이끄는 거짓된 세이렌의 노래일 뿐이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과 시대의 징표를 분별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세상에 알려져야 할 모습은 광장에서 흔드는 깃발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묵묵히 지고 가는 십자가의 모습이어야 한다. 분열된 시대를 향한 우리의 유일한 응답은 주먹 쥔 두려움이 아니라, 두 팔 벌린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부르심이자 영원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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