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마르나, 영원한 말씀 위에 서는 교회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29 08:30
본문
고대 예루살렘의 흙먼지 속에서 발굴된 2,600년 전 여인의 얼굴 틀에서부터, 아이티의 피로 물든 교회, 독일의 소란한 정치 광장, 그리고 네팔의 비극적인 홍수 현장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소식들은 혼돈의 파편처럼 흩어져 우리 앞에 놓였다. 이 모든 사건들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졌지만, 마치 한 폭의 거대한 태피스트리처럼 인류의 근원적인 고통과 방황이라는 하나의 실로 엮여 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점토 틀은 단순한 고고학적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손으로 만든 형상을 숭배했던, 인간의 영원한 갈망이자 배교의 서글픈 초상이다. 스스로 신을 만들어내려는 이 뒤틀린 욕망의 끝이 어디인지를 아이티의 참상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성한 피난처가 되어야 할 교회가 무장 괴한들의 무자비한 학살 현장으로 변한 것은, 인간이 만든 우상과 이념이 결국 서로를 삼키는 지옥도를 현실에 그려낸 것이다. 독일의 정치 지형 속에서 좌우의 극단적인 이념 사이에 끼어 비판의 대상이 된 교회의 모습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의 바다 한가운데서, 교회는 어디에 그 닻을 내려야 하는가. 역사는 그 답을 위한 하나의 예화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2세기 중반,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로마 총독 앞에서 신앙을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총독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황제를 숭배하라”고 명했다. 잠시 침묵하던 노감독은 이내 입을 열어, 시대를 관통하는 신앙의 고백을 남겼다. “내가 팔십육 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으나,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이시요 나의 구원자이신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폴리캅의 굳건함은 정치적 신념이나 철학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닻은 로마 제국의 권력이나 세상의 평판이 아닌, 오직 인격적인 주님과의 오랜 관계 속에 깊이 내려져 있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독서율 통계는 한국 교회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세상 사람들도 여전히 책을 읽으며 사유의 깊이를 더하려 애쓰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그 책’, 곧 성경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조류에 흔들리는 이유는, 폴리캅과 같이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지 못하고 시대정신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 하기 때문은 아닌가. 네팔의 대홍수 현장에 달려가 구호의 손길을 내미는 기독교인들의 헌신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그 섬김의 동력이 인간적인 연민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의 아파하는 마음에 닿아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아일랜드의 복잡한 정체성 속에서 성육신의 의미를 고찰하는 지성의 노력 또한, 결국은 말씀 안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으려는 거룩한 몸부림이다.
결국 교회가 돌아가야 할 곳은 단 하나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사상, 문화와 아름다움은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다. 잠시 피었다가 이내 시들고 사라질 것들이다. 교회는 시드는 것들에 소망을 두는 공동체가 아니라, 영원히 서 있는 것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말씀의 닻을 깊이 내려야 한다. 그 말씀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반석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6-8)
이처럼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의 바다 한가운데서, 교회는 어디에 그 닻을 내려야 하는가. 역사는 그 답을 위한 하나의 예화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2세기 중반,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로마 총독 앞에서 신앙을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총독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황제를 숭배하라”고 명했다. 잠시 침묵하던 노감독은 이내 입을 열어, 시대를 관통하는 신앙의 고백을 남겼다. “내가 팔십육 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으나,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찌 나의 왕이시요 나의 구원자이신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폴리캅의 굳건함은 정치적 신념이나 철학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닻은 로마 제국의 권력이나 세상의 평판이 아닌, 오직 인격적인 주님과의 오랜 관계 속에 깊이 내려져 있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독서율 통계는 한국 교회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세상 사람들도 여전히 책을 읽으며 사유의 깊이를 더하려 애쓰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그 책’, 곧 성경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조류에 흔들리는 이유는, 폴리캅과 같이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지 못하고 시대정신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 하기 때문은 아닌가. 네팔의 대홍수 현장에 달려가 구호의 손길을 내미는 기독교인들의 헌신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나 그 섬김의 동력이 인간적인 연민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의 아파하는 마음에 닿아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아일랜드의 복잡한 정체성 속에서 성육신의 의미를 고찰하는 지성의 노력 또한, 결국은 말씀 안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으려는 거룩한 몸부림이다.
결국 교회가 돌아가야 할 곳은 단 하나다. 세상의 모든 권력과 사상, 문화와 아름다움은 풀과 같고 들의 꽃과 같다. 잠시 피었다가 이내 시들고 사라질 것들이다. 교회는 시드는 것들에 소망을 두는 공동체가 아니라, 영원히 서 있는 것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말씀의 닻을 깊이 내려야 한다. 그 말씀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반석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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