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태울 것인가, 데울 것인가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25 08:30
본문
불은 인류의 오랜 동반자였다. 때로는 모든 것을 삼키는 파괴의 불길로 공포를 자아내고, 때로는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온기로 안식을 주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불은 여전히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유럽의 산야를 태우는 거대한 산불과 도시의 건물을 집어삼키는 화마의 소식은 불의 파괴적인 힘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과 둘러앉은 캠프파이어의 작은 불꽃은 그 어떤 것보다 따스한 위로와 평안을 선사한다.
오늘 한국 교회 앞에 놓인 시대적 상황은 마치 이 불의 양면성과 같다. 교회 안에 타오르는 거룩한 분노와 열정이라는 불이 과연 세상을 살리는 온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길이 될 것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 앞에 서 있다. 차별금지법과 같은 세속적 가치의 도전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려는 외침은 분명 필요하다. 이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의 사명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불꽃이다. 그러나 이 불꽃이 자칫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불길로 번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의 빛이 아닌 파멸의 재앙이 되고 만다.
최근 미국 기독교계에서 논란이 된 '통치 신학'의 오만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사회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인이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세상의 권좌를 탐했던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이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그는 지상에 재림한 예수를 향해, 당신이 주신 자유는 인간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기에 교회가 그 자유를 거두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항변한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 세워진 그의 왕국은, 결국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한 거대한 바벨탑에 불과했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대신 지배하려 할 때, 그 열정은 가장 위험한 불이 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펴야 할 참된 불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그 답을 콩고민주공화국의 절망의 땅에서 발견한다. 에볼라라는 죽음의 불길이 창궐하는 곳에서, 복음주의 NGO들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병든 자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야말로 세상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거룩한 불꽃이다. 암이라는 고통의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온전히 신뢰했던 골프선수 폴 애징거의 간증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내면에서 타오른 조용한 믿음의 불씨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세상에 참된 평안과 소망의 온기를 전한다.
주님께서는 권력의 정점을 꿈꾸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한국 교회는 지금 어떤 불을 지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세속적 권력을 탐하며 세상을 태우는 대심문관의 불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태워 세상을 데우는 그리스도의 불을 따를 것인가. 우리의 사명은 일곱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산의 그늘진 모든 골짜기에 들어가 섬김의 불, 사랑의 불, 희생의 불을 지피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 앞에 놓인 시대적 상황은 마치 이 불의 양면성과 같다. 교회 안에 타오르는 거룩한 분노와 열정이라는 불이 과연 세상을 살리는 온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길이 될 것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 앞에 서 있다. 차별금지법과 같은 세속적 가치의 도전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려는 외침은 분명 필요하다. 이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의 사명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불꽃이다. 그러나 이 불꽃이 자칫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불길로 번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의 빛이 아닌 파멸의 재앙이 되고 만다.
최근 미국 기독교계에서 논란이 된 '통치 신학'의 오만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사회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인이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세상의 권좌를 탐했던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이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그는 지상에 재림한 예수를 향해, 당신이 주신 자유는 인간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기에 교회가 그 자유를 거두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항변한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명분 아래 세워진 그의 왕국은, 결국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한 거대한 바벨탑에 불과했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대신 지배하려 할 때, 그 열정은 가장 위험한 불이 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지펴야 할 참된 불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그 답을 콩고민주공화국의 절망의 땅에서 발견한다. 에볼라라는 죽음의 불길이 창궐하는 곳에서, 복음주의 NGO들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병든 자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야말로 세상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거룩한 불꽃이다. 암이라는 고통의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온전히 신뢰했던 골프선수 폴 애징거의 간증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내면에서 타오른 조용한 믿음의 불씨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세상에 참된 평안과 소망의 온기를 전한다.
주님께서는 권력의 정점을 꿈꾸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한국 교회는 지금 어떤 불을 지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세속적 권력을 탐하며 세상을 태우는 대심문관의 불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태워 세상을 데우는 그리스도의 불을 따를 것인가. 우리의 사명은 일곱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산의 그늘진 모든 골짜기에 들어가 섬김의 불, 사랑의 불, 희생의 불을 지피는 것이다.
기사 공유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