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파도 앞에서, 교회는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9-11 08:30
본문
21세기의 세 번째 십 년을 지나는 오늘의 세계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배와 같다.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이 개신교인들의 지지 속에 약진하고,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은 문화를 교류하던 통로마저 막아서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복음주의의 양적 팽창 이면에 영적 공허를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고, 영국에서는 뉴에이지 영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기술은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들어내며 경이로움과 함께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시대다. 이 혼돈의 파도 앞에서 교회는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가.
특히 독일 작센안할트주 선거 결과는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위기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외국인 ‘재이주’라는, 사실상의 추방을 공약으로 내건 정당에 개신교인 유권자 3분의 1이 표를 던졌다는 소식은 충격을 넘어 비탄을 자아낸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선택의 문제를 넘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두려움과 배제라는 세속의 논리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징후다.
역사는 이러한 위기 앞에서 교회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20세기 독일,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만들려 했던 나치즘의 광풍 앞에서 ‘독일 기독교인(German Christians)’들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십자가 대신 갈고리 십자가(하켄크로이츠)를 택했고, 값싼 은혜에 안주하며 불의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바로 그 암흑의 시대에,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이들이 이끈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는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본회퍼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요, 공동체 없는 세례이며, 고백 없는 성찬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의 대가가 없는 은혜”라고 외치며, 시대의 우상에 맞서 진리의 편에 서는 ‘값비싼 은혜’를 역설했다. 오늘날 독일 교회의 일부가 보여주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고백교회의 저항 정신보다는 ‘독일 기독교인’들의 값싼 타협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절망의 소식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파키스탄 법원이 미성년자 혼인을 아동 학대로 판결하며 연약한 소수 종교 소녀들을 보호할 길을 연 것은, 어둠 속에서도 정의의 빛이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네수엘라의 지진 폐허 속에서 월드비전이 ‘마라톤’과 같은 끈기로 구호의 손길을 멈추지 않는 모습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의 참된 사명이 무엇인지 웅변한다. 또한, 브라질의 축구 선수 가브리엘 제수스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획”이라 고백하고, 영국 교회가 대안적 영성에 대한 성경적 지침서를 발간하며 세상의 영적 갈증에 응답하려는 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빛을 발하려는 성도들의 몸부림을 증거한다.
결국 문제는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민족이나 국가, 이념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의 본질을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이 말씀은 모든 인위적인 장벽과 분열을 넘어, 그리스도의 피로 한 가족 된 교회의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선포한다. 한국 교회는 오늘의 세계가 전하는 소식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두려움에 편승하여 우리만의 성벽을 높이 쌓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 다리를 놓는 교회가 되고 있는가. 시대의 파도는 거세지만, 교회가 닻을 내려야 할 곳은 세상의 불안이 아닌,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여야만 한다.
특히 독일 작센안할트주 선거 결과는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위기의 본질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외국인 ‘재이주’라는, 사실상의 추방을 공약으로 내건 정당에 개신교인 유권자 3분의 1이 표를 던졌다는 소식은 충격을 넘어 비탄을 자아낸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선택의 문제를 넘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두려움과 배제라는 세속의 논리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징후다.
역사는 이러한 위기 앞에서 교회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20세기 독일,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만들려 했던 나치즘의 광풍 앞에서 ‘독일 기독교인(German Christians)’들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십자가 대신 갈고리 십자가(하켄크로이츠)를 택했고, 값싼 은혜에 안주하며 불의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바로 그 암흑의 시대에, 디트리히 본회퍼와 같은 이들이 이끈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는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본회퍼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요, 공동체 없는 세례이며, 고백 없는 성찬이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의 대가가 없는 은혜”라고 외치며, 시대의 우상에 맞서 진리의 편에 서는 ‘값비싼 은혜’를 역설했다. 오늘날 독일 교회의 일부가 보여주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고백교회의 저항 정신보다는 ‘독일 기독교인’들의 값싼 타협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절망의 소식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파키스탄 법원이 미성년자 혼인을 아동 학대로 판결하며 연약한 소수 종교 소녀들을 보호할 길을 연 것은, 어둠 속에서도 정의의 빛이 스며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네수엘라의 지진 폐허 속에서 월드비전이 ‘마라톤’과 같은 끈기로 구호의 손길을 멈추지 않는 모습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의 참된 사명이 무엇인지 웅변한다. 또한, 브라질의 축구 선수 가브리엘 제수스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계획”이라 고백하고, 영국 교회가 대안적 영성에 대한 성경적 지침서를 발간하며 세상의 영적 갈증에 응답하려는 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빛을 발하려는 성도들의 몸부림을 증거한다.
결국 문제는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민족이나 국가, 이념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의 본질을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이 말씀은 모든 인위적인 장벽과 분열을 넘어, 그리스도의 피로 한 가족 된 교회의 영광스러운 정체성을 선포한다. 한국 교회는 오늘의 세계가 전하는 소식들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두려움에 편승하여 우리만의 성벽을 높이 쌓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 다리를 놓는 교회가 되고 있는가. 시대의 파도는 거세지만, 교회가 닻을 내려야 할 곳은 세상의 불안이 아닌,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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