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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의 벽 앞에서, 율법의 더 중한 바를 묻다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01 08:30

본문

미국성서공회가 필라델피아 본부에 성경 보급의 역사를 빛낸 인물들을 기리는 '변화 선도자'의 벽을 세웠다. 과거의 헌신을 기억하고 그 유산을 계승하려는 시도는 숭고하며 마땅히 격려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기념의 벽은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거울이 된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신앙적 업적이라는 '형식'을 기념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삶을 관통했던 복음의 '본질'을 오늘 우리의 삶으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의 교회가 마주한 위기의 핵심을 꿰뚫는다. 현대 교회는 수많은 '형식'의 우상에 둘러싸여 있다. 특정 정치 이념이 절대적 신앙의 기준이 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복음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둔갑한다. 예수는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건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빌려 세속의 깃발을 흔들기에 여념이 없다. 프랑스에서 교황의 방문에 수십만 인파가 운집하는 장관이 연출되지만, 그 거대한 형식의 물결 속에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회심의 본질이 담보되어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이러한 형식주의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15세기 스페인 세비야에 재림한 예수를 체포하며 이렇게 일갈한다. "우리는 당신의 업적을 수정했소." 대심문관은 예수가 주려 했던 고독하고 숭고한 자유의 '본질' 대신, 교회가 제공하는 기적과 신비, 권위라는 안정된 '형식'을 백성에게 주었다고 강변한다. 인류를 불행한 자유로부터 해방시켜 행복하게 만든다는 명분 아래, 그는 그리스도를 배제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완성했다. 이는 오늘날 법적 정당성, 제도적 안정성, 교단의 명예라는 이름 아래 복음의 야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닌가.

대심문관의 논리는 스페인에서 들려온 소식들 속에서 섬뜩하게 되살아난다. 71년간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는 87세 노인의 비극은 '합법'이라는 형식 뒤에 숨어버린 공의의 실종을 고발한다. 수십 년간 차별받은 목회자들의 연금을 다루는 법령이 '불충분하다'는 외침 역시, 형식적 조치가 고통의 본질을 외면할 때 얼마나 공허한지를 증언한다. 교회는 세상의 법을 존중하되, 그 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사명이 있다. 북유럽의 기업인들이 '더 강하게 함께' 모여 재정적 제자도를 논하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를 '놀랍게 지음 받은' 존재로 끌어안는 모습이야말로, 껍데기를 넘어 알맹이를 추구하는 신앙의 실천적 대안이다.

기념의 벽은 과거를 박제하는 공간이 아니라,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향한 결단을 촉구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 화려한 형식과 외형적 성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율법의 더 중한 바를 회복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했던 주님의 грозное 책망이 오늘 우리를 향한 애통의 음성으로 들려야 할 때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태복음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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