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더리움, AI 자율결제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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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플랫폼 이더리움(Ethereum, ETH)이 새로운 표준인 ERC-8004를 통해 인공지능(AI) 에이전트 간 신뢰 기반 상거래 환경을 구현하며 디지털 경제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변곡점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결제와 정산은 인간 사용자를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 위에서 이뤄졌지만, 이제는 AI가 스스로 신원을 증명하고, 평판을 축적하며, 자산을 관리하고, 다른 AI와 계약을 체결하고, 자동으로 대금을 정산하는 ‘자율 경제(Autonomous Economy)’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번에 도입된 ERC-8004는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AI가 경제 활동의 독립적 주체로 기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신뢰 인프라(Trust Infrastructure)’를 온체인에 구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AI 에이전트는 인터넷상에서 신뢰할 수 없는 자동화 트래픽으로 분류되어 결제 시스템 접근이나 데이터 활용에 제약을 받아왔다. 하지만 ERC-8004는 식별(Identity), 평판(Reputation), 검증(Verification)이라는 세 가지 경량 레지스트리를 통해 이러한 제약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구조를 제시했다.
식별 레지스트리는 각 AI 에이전트에 검열 불가능한 온체인 고유 식별자를 부여함으로써, 특정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을 제거한다. 평판 레지스트리는 거래 상대방이 서명한 피드백을 축적해 신뢰도를 정량화한다.
검증 레지스트리는 고난도 업무나 고액 거래가 이뤄질 경우 제3자가 해당 작업의 적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절차를 제공한다. 이는 기존 중앙화 플랫폼에서 기업이 독점적으로 관리하던 신뢰 구조를 분산형 네트워크 상으로 이전한 것과 다름없다.
▶ 2주 만에 2만4천개 등록, 속도전 시작
표준 도입 이후의 시장 반응도 빠르다. 2026년 1월 말 이더리움 메인넷에 ERC-8004가 적용된 뒤 불과 2주 만에 약 2만4천 개의 AI 에이전트가 네트워크에 등록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단순한 실험 단계가 아니라 실제 경제 활동을 전제로 한 인프라 수요가 이미 존재한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해당 표준은 이더리움 메인넷에 국한되지 않고 베이스(Base), 아비트럼(Arbitrum), 옵티미즘(Optimism) 등 주요 레이어2 네트워크에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레이어2 확장은 거래 비용 절감과 처리 속도 개선을 통해 AI 에이전트 간 마이크로 결제와 실시간 정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AI가 API 사용료를 초 단위로 지불하고, 데이터 접근 권한을 자동 구매하며, 연산 자원을 실시간으로 임대하는 구조가 현실화될 경우, 블록체인은 ‘머신 투 머신(M2M) 경제’의 핵심 금융 레이어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다.
▶ 스테이블코인과 결합, 거래 마찰 최소화
전문가들은 특히 스테이블코인과의 결합에 주목하고 있다.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 대신 법정화폐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AI 에이전트 간 자동화 결제가 보다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이는 기존 국제 금융 시스템이 겪어온 환율 변동 리스크, 중개 수수료, 결제 지연 문제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구조다.
AI 기반 경제가 활성화될수록 실시간 정산, 24시간 국경 없는 결제, 프로그램 가능한 자산 이전이 가능한 블록체인 인프라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글로벌 전자상거래, 클라우드 컴퓨팅, 데이터 거래 시장에서 AI가 스스로 서비스 이용료를 지불하고 수익을 분배하는 구조가 자리 잡을 경우, 기존 중앙화 결제 게이트웨이의 역할은 상당 부분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 AI·블록체인 융합, 산업 전반 확산
AI와 블록체인의 결합은 이더리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비트코인(BTC) 채굴 업계가 인공지능 연산 인프라로 사업 모델을 전환하며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는 흐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반도체 산업과 연결된 AI 연산 수요는 가상자산 생태계 전반의 구조적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술 산업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금융·무역·콘텐츠·물류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계약을 체결하고, 공급망 데이터를 분석하며, 결제를 집행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구조가 일반화되면, 기업의 운영 방식 자체가 자동화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 ‘자율 경제’의 서막…규제와 제도 정비 과제
다만 과제도 적지 않다. AI 에이전트가 독립적 경제 주체로 활동할 경우 법적 책임 소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탈중앙화 신원 체계와 기존 규제 프레임워크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자금세탁방지(AML), 고객확인(KYC), 데이터 보호 규정 등과의 정합성 역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ERC-8004가 제시한 구조를 디지털 경제 진화의 중요한 단계로 평가하고 있다. 과거 인터넷이 정보 전달의 방식을 바꿨다면, AI와 블록체인의 결합은 가치 교환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거래를 직접 수행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알고리즘과 코드가 상거래를 수행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더리움은 이번 표준 도입을 통해 단순한 스마트 계약 플랫폼을 넘어 AI 경제의 신뢰 계층을 제공하는 금융 인프라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을 분명히 했다. 에이전트가 스스로 자산을 보유하고 관리하며, 다른 에이전트와 협업해 가치를 창출하는 구조가 확산될수록 블록체인은 ‘디지털 사회의 결제 레일’로 기능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이번 변화가 향후 디지털 자산 채택 속도를 가속화하고,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모델을 정착시키는 기반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만 결제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은 과장이 아니라, 기술과 금융이 결합한 구조적 전환의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C) 기독교마라나타신문 2026-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