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자리에 없다”는 말,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시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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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 기자
작성일 2026-09-18 08:20
본문

이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혹은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기만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 표현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충격을 주는 힘을 잃었지만, 양심의 질문을 던진다.
진실이 대가를 요구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우리는 아마도 어려움 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을 좋게 보이게 한다면, 그것은 큰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직함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때 진정한 시험이 찾아온다.
직장에서 “지금 만날 수 없다”거나 “바쁘니 나중에 다시 전화 달라고 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변명할 필요 없이 사생활, 일정, 그리고 대화를 원하지 않을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이 작은 일상적인 장면은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진실과 같은 기본적인 원칙을 얼마나 쉽게 희생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의의 거짓말’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부드럽게 만드는 법을 배웠다. ‘선의의 거짓말’, ‘자비로운 거짓말’, ‘필요한 거짓말’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그 심각성을 줄이는 것처럼 보인다. 책임의 정도를 다르게 인식하는 것과,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거짓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작은 거짓말도 여전히 거짓이며, 따라서 죄이다.
모든 거짓말이 같은 결과를 초래하거나 같은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거짓말을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거짓 증언이나 심각한 해를 끼치는 기만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기독교 전통은 죄의 정도를 구분하며, 사소한 죄와 치명적인 죄를 구분하는 거짓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책임의 정도를 다르게 인식하는 것과,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거짓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작은 거짓말도 여전히 거짓이며, 따라서 죄이다.
출처: Evangelical Focus | 원문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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